프라이버시권은 미국에서 생성 및 발전한 권리다. 그러나 수정헌법에 직접 명시되지는 않았다. 법원과 국민에 의해 인정되어 온 헌법상의 권리인 것이다. 프라이버시라는 개념 자체가 다소 최근의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프라이버시 영역은 헌법상 명시된 권리에 의해 직접 보호받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영향을 받음으로써 구체적 권리들이 다양하게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미국에서 오랜 기간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되어 온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의 의미는 계속해서 변해왔다. 그리고 이것도 상당히 당연한 일일테다. 프라이버시, 즉, 사생활 비밀이라는 것은 정보통신의 진보로 인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라이버시권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 추상적일 수 있으나, 그것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 본다면 프라이버시권의 본질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라이버시권은 사실 미국의 독립 이전부터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1763년 영국 의회연설에서 William Pitt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오두막 안에서는 왕의 권력에 반항할 수 있으며, 폐허가 되는 오두막이라도 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 오두막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의 집 안에서는 정부의 권력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이처럼, 이미 미국 건국 이전에 프라이버시권은 '인간이 자신의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연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1763년, '가난한 사람이라도' 라는 키워드를 고려했을 때, 그당시까지는 부유한, 권력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 신분 격차가 아닌, 부에 의한 주거 환경의 차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개인의 방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서민층에서는 낯선 개념이었고, 가족들이 한 방을 쓰기 때문에 프라이버시의 개념 자체가 옅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보편적 프라이버시가 태동하는 중요한 시기는 주거 환경의 개선과 맞물린다.
그리고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는 프라이버시권을 자신의 집 안에서 누려야 할 안전권으로 이해하였다. 우리나라가 압수·수색을 할 때 영장에 의해서만 진행을 하는 것에도 이러한 프라이버시권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보편적 프라이버시 태동이 주거환경의 변화라면, 보편적 프라이버시의 본격적 확대는 사회·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프라이버시의 의미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프라이버시의 의미가 옅어진 것은 아니다. 되려, 강해졌다. 당장 서울을 예시로 들었을 때, 서울에 사는 인구가 약 960만 명으로, 인구밀도는 1제곱 킬로미터당 약 1만 6천 명이다. 30.3평에 16명이 살고있는 셈이다. 물론, 대한민국이 극단적인 아파트 주거문화를 자랑하고 있기에 인구밀도가 타 국가에 비해 체감은 낮은 편이기는 하다. 어찌되었든, 너무 복잡하고 혼잡한 도시의 생활로 인해 개인의 공간은 더욱 귀중한 의미를 갖게 된다. 다만,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인해 다른 프라이버시의 개념이 많이 생겨났을 뿐이다. 전화의 발명으로 우리의 대화, 소리에 대한 프라이버시가 등장했고, 카메라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의 초상권 등에 대한 프라이버시가 등장한 것이다. 즉, 점점 프라이버시는 혼자만의 공간을 보호하는 의미를 넘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권리(the right to be let alone)라는 포괄적 의미로 확장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개인의 믿음, 사고, 감정, 기분 등 지성과 감성의 정신적 영역도 프라이버시 영역에 속하게 됐다.
그리고 20세기를 거치면서, 프라이버시권의 보호는 결혼과 양육, 가정생활, 피임, 동성애 등 성생활, 낙태, 존엄사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것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인격의 불가침성이 프라이버시권의 기본원리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공동체의 다수가 비상식적, 비윤리적으로 보더라도, 프라이버시권은 이러한 규범적 비난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이 자신의 사적인 삶을 존중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현대에 있어 프라이버시는 현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헌법상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사적 생활영역에서의 최종적 선택의지, 즉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적 영역에서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적 형식성을 내용으로 하기에 프라이버시권은 각각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권리들을 그 이름으로 생성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인격의 불가침성'을 이야기했는데, 인격권과 프라이버시권은 구분되는 개념이다. 인격권은 인격의 형성 · 유지 · 표현 등 인격의 발현을 내용으로 한다. 그래서 프라이버시권과 같이 관념적 · 형식적 성격의 권리이다. 이 둘은 공통점이 상당히 많기에 인격권과 프라이버시권을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일반적 행동의 자유와 좁은 인격적 생활영역의 권리
프라이버시권이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에 의한 구체적 보장들을 매개로 새로운 권리들을 생성하는 반영권의 성격을 갖는다면, 일반적 인격권 또한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의 보호영역을 포함하는 포괄적 권리의 성격과 함께 그러한 기 본권들로 보호받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인격적 보호법익을 포착하는 보충적 권리 의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인격권을 한정된 권리로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앞서 말한 프라이버시권과 동일한 보편적 · 관념적 형식의 권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 행동의 자유와 좁은 인격적 생활영역의 권리는 현실에서 실현되는 인격권의 양면적 모습으로 상호 불가분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 행동의 자유의 경우, 헌법상 개별 기본권들을 인격권의 구체적 실현으로 보는 포괄적 권리로 설명한다면, 좁은 인격적 생활영역의 권리는 헌법상 개별 기본권들로 보호받지 못하는 공백 영역에서 헌법적으로 보호받는 인격적 이익을 파악하는 거름망으로서 보충적 권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격권은 구체적이지 않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기에 오히려 인격권의 독립성을 지킨다고 볼 수 있다. 인격권도 마찬가지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이 바뀔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인격권을 기반으로 다양한 권리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숱하게 들어온 자기결정권은 인격권이 관념적 형식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본질적 요소이다.
2. 규범적 요소로서 인격권 및 인간의 존엄성이 갖는 관념적 형식성
무명의 자유권·비명시적 자유권인 인격권은 그 기초가 자기결정권에 있다. 개인의 내밀한 인격과 자기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프라이버시권도 사적인 삶의 자유로운 형성에 대한 자율성, 즉 자기결정권을 중심으로 한다. 이 인격권에서의 '인격'에 대해 몇몇 견해가 있다.
첫째, 정신적 · 윤리적 의미에서의 참된 인간성을 성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둘째, 순수하게 정신적·윤리적 발전에 한정된 것은 아니고 자신의 인격적인 생활영역을 보장하는 한도에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
둘이 차이가 있지만, 어느 견해건 견해적 · 사실적 존재로서 인간에 그치지 않고 관념적 · 당위적 존재로서 인간을 지향하는 차원으로써 인격을 논한다. 즉, 우리는 인격권이 가지는 의미는 경험적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특정한 행동이나 상태를 헌법적 질서 하에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로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규범적 판단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근본규범으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불가분적 관계에 있는 인격권
신체의 자유, 직업의 자유, 재산권 등 현실의 특정한 생활영역과 관련된 실체적 내용으로 이루어진 개별 기본권들과 달리, 프라이버시권과 인격권은 여러 생활 영역과 포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관념적 형식의 일반적 권리다. 프라이버시권과 인격권은 그 관념성과 형식성으로 인해 특정한 경험세계에 국한되지 않는 초월적 자유를 지향한다. 따라서 근본 규범이 갖추어야 할 요건인 사유규범적 형식성, 순수 당위성, 논리적 전제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성생활, 의료영역 자체를 보호한다기 보다는, 그것들에 비해 자신만의 개성을 자유롭게 발현하는 것을 보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프라이버시권과 인격권 중 어떤 것을 근본 규범으로 보아야 할까? 헌법 상의 인간상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 · 사회관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자신의 책임 아래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성숙한 민주시민”이다. 이는 외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형성 · 유지하는 균형 잡힌 자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프라이버시권보다는 외부와의 소통을 통한 정체성을 지향하는 인격권이 대한민국 헌법체계의 근본규범으로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4. 탈대상화된 권리로서 인격권과 그 요소인 자기결정권 및 자기책임원리
헌법재판소는 인격권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개인과 분리할 수 없는 인격적 이익을 향유하는 권리로서의 인격권
둘째, 인격권을 개인이 자신의 생활영역을 자율적으로 형성하는 권리로 설명하는 것
인격권은 권리주체로 존재할 수 있게 자율성을 보장하는 권리라는 점에서 관념적 형식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둘째 설명이 인격권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격권에서는 보호대상이 되는 인격적 이익들을 배제한 채 탈대상화된 권리로서의 인격권이 존재한다. 이를 인격권의 탈존재화라고도 한다. 존재적 대상 없이 인격적 주체에 관한 의미 또는 소통매체로 인격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인격권의 개념이 분명해진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탈대상화·탈존재화된 인격권은 자기결정권과 자기책임원리를 구성요소로 한다.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인격과 운명에 관한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거나 개성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로 자기운명결정권이라고도 한다. 자기결정권을 보장함으로써 인간은 창의적이고 성숙한 개체이며 이성과 책임을 지닌 인격체로서 자신이 결정 · 선택한 것을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격권은 각 개인이 다양한 생활영역에서 자기결정권의 행사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실현하면서도, 자기책임원리에 따라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나타난 결과에 대하여는 타인이나 공동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무형의 자유권이라 볼 수 있다.
5. 자연인으로서 개인의 정체성과 프라이버시권
프라이버시권은 앞서 꾸준히 말했듯, 인격의 불가침을 기본으로 하는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권리다. 그러나 프라이버시권은 인격권과 같은근본 규범이 아니고, 헌법 제17조에 규정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에 의해 별도로 보장된다. 인격권과 같이 관념적 형식성을 갖는데 왜 별도로 보장을 받는 것일까? 우리의 헌법이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로 표현하는 프라이버시권은 바로 개인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하여 자연인으로서 갖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권리다. 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고양하는 과정에서 프라이버시권은 각자가 자연인으로서 갖는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격권과의 차별점이 드러난다. 프라이버시권의 경우, 사적 영역에서의 자기결정권은 보장하되, 인격권과 달리 자기결정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자기책임의 원리는 적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개인은 사생활의 비밀 과 자유로 보호받는 범위 내에서 법적 · 윤리적 책임의 부담 없이 자기만의 개성을 발현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6. 프라이버시권과 인격권의 보호대상
프라이버시권과 인격권의 이론적 구분은 현실의 사례에서도 논의의 실익이 있다. 프라이버시권도 자신의 내밀한 인격에 관한 정보를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사적 영역에서의 자기결정권을 구성요소로 한다. 따라서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타인이 본인의 승낙을 받고 그 범위 내에서 공개한다면 민사상 불법행위책임 등 법적 책임을 타인에게 물을 수 없다. 그러나 본인의 승낙 없이 타인이 이를 외부로 공개할 경우에는 그 자체만으로 본인의 고유한 개성을 부정하거나 부정 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된다.
헌재에서는 수치심이나 모욕감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인격권으로 보고는 있으나, 막상 판례를 살펴보면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신체부위의 공개를 강제당하는 경우, 이는 인격권보다 프라이버시권 침해로 보고 있다. 그리고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감정인 모욕과 달리, 명예는 그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써 외부에서 매겨지는 개인의 객관적 가치로 볼 수 있다. 이는 프라이버시권이 아닌 인격권의 보호 대상이다.
즉, 프라이버시권은 사회적 · 윤리적 책임을 벗어나 개인의 고유한 개성만을 보호하고, 인격권은 외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고양된 인격을 전제로, 그 사람의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가치인 명예를 보호함에 있어 부합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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